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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만 바라보는 아내. 모두 내 탓이지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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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s****
2020-05-17
조회 17984
추천 3

 

헌신적인 여인은 헌신의 대상을 쉽게 놓아주지 않습니다.

조숙한 아이는 불행한 어른을 떠메고 묵묵히 걸어갑니다.

거꾸로 돌아가는 그들의 안타까운 시계바늘을 누가 되돌려놓을 수 있을까요?

 

엄마를 어깨에 떠메고 사는 아들.

모두 내 탓이지만...

 

요즘 제 아내의 시계는 세상과 거꾸로 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온 나라가 바이러스 때문에 침울해 있는데,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몸놀림도 봄바람처럼 가볍기만 합니다.

몇 달째 집안에 갇혀 중학생 아들의 수발만 들고 있으면서 뭐가 그렇게 즐거울까요?

 

실은 그 중학생 아들의 수발이 아내가 즐거운 이유라는 걸 저는 압니다.

본인의 입으로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지금 이 때가 아니면 언제 아들을 이토록 독점해보겠느냐고요.

아닌 게 아니라 아들과 엄마는 서로를 완전히 독점하고 있습니다.

오전 7시 반에 아들을 깨워서, 조는 녀석 아침밥을 떠먹이는 걸로 엄마의 하루는 시작됩니다.

온라인 수업 받는 동안 공부방에 간식 들여놓으며 혹시 잠들지는 않았는지 수시로 체크하고,

12시에는 급식실처럼 식사 준비를 마치고 아들을 기다리죠.

오후엔 둘이서 운동 삼아 공원 산책을 나갑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는 저녁 준비를 하고 아들은 학원 숙제를 하지요.

저녁 먹으며 같이 티비를 보고, 설거지가 끝나는 밤 아홉 시부터는

아예 마주앉아 아들의 취약과목을 함께 공부합니다.

그리고 물론 아들이 잠들고 난 새벽 시간에 엄마는 소파에서 잠이 듭니다.

 

마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 듯, 아내는 아들을 중심으로 공전 중입니다.

만약 저였다면 애저녁에 멀미가 났을 것 같은데, 아내는 그 일이 무척 즐겁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건 아들의 태도입니다.

하루종일 엄마와 함께하는 생활인데도 답답한 기색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이런 집이 또 있을까요?

2 남자아이와 갱년기 초입의 엄마 사이에 큰소리 한 번 나는 일이 없으니...

 

대체 뭐가 문제냐고 하겠지요.

문제는 남편이자 아빠인 저입니다.

완벽해 보이는 모자 곁에서 제가 자꾸 딴지를 걸게 되네요.

엄마와의 하루 계획이 꽉 차 있는 아이에게, 오늘은 아빠랑 등산 가자고 말해 봅니다.

하루쯤은 공부를 접고 멍해져 보라고 말하고, 돈을 쥐어주며 친구 불러내서 놀러 가라고 부추깁니다.

불러낼 친구가 없다는 아들에게 사내 자식이 친구가 그렇게 없어서 어떡하냐고 혀를 차고,

엄마 치마폭에 싸여 있으면 남자가 될 수 없다는 소리까지 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아내가 다가와 제게 조용히 따져묻지요.

당신 뭐가 불만이냐고. 반듯하게 잘 자라고 있는 아들한테 왜 자꾸 부정적인 말을 하느냐고요.

그러면 저도 물러서지 않고 내 생각을 꺼내놓지요.

 

공부 잘 하고 말썽 안 피운다고 잘 자라고 있는 게 아니야.

 사내녀석은, 사내다운 장난기와 호기심이 있어야 돼.

 엄마는 모르는 저희들끼리의 세상이 있어야 한다고.”

 

남자다움에 대한 당신 생각이 요즘 세대와 안 맞을 수도 있어.”

 

제 엄마가 좋아하는 90년대 팝이나 꿰고 있고,

 엄마가 보는 드라마 보며 중년 여배우들 이름이나 알아가는 게 요즘 아이들이 말하는 남자다운 모습은 아닐 걸.”


그럼 어때야 해? 엄마는 이해 못 한다, 엄마와는 말이 안 통한다고 밀어내고,

 눈속임과 거짓말로 엄마를 실망시켜야 비로소 남자다운 건가?”

 

아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눈앞의 아내는 이미, 타임머신을 타고 10년 전 그 때로 돌아가 있으니까요.

아내가 갑자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면 남편인 저는 무력감에 빠집니다.

매번 놀라지만, 아내가 느꼈던 고통스러운 감정과 세세한 기억들은 세월이 가도 전혀 퇴색하지를 않습니다.

언제라도 눈빛 하나, 단어 하나에 생생히 되살아나는 모양입니다.

 

10년 전, 저는 함부로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당신은 이해 못해. 당신과는 말이 안 통해.’

돌이켜보면 그 말은, 여느 중학생이 엄마한테 하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철없는 소리였습니다.

집이 재미 없고, 엄마의 감시와 규율이 답답하다는 소리이자,

바깥 세상에는 엄마가 모르는 신나는 일들이 너무도 많다는 소리였지요.

그 말과 함께 저는 가벼운 거짓말로 한동안 아내를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장난이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게 된 아내의 분노는 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가벼운 거짓말이 더욱 모욕적인 거짓말이며, 의미 없는 장난이야말로 잔인한 짓이라고 비명을 지르더군요.

그날부터 우린 오랜 시간 다투었습니다.

내가 한 짓이 우리 결혼에 어느 정도로 파괴적인 짓이었는지를 규명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이제 그만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했고, 아내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끝내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 아내는 배신감을, 저는 억울함을 끌어안고 서로 입을 다물고 말았지요.

대화가 메마른 시간이 한참 더 흐르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아내는 헌신할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저는 애초에 그런 헌신을 받을 자격이 없는 놈이었음을 말입니다.

 

언제부턴가 아내의 헌신은 오롯이 아들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야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제가 걱정하는 건 아들의 순종입니다.

아들은 엄마 말이라면 꼼짝 못합니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오직 엄마가 보여주는 세상을 봅니다.

온순한 성격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뻔뻔한 말이지만,

제 생각엔 아들이 엄마의 아기로 남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엄마가 그걸 원하니까요.

 

실은 며칠 전 아들이 불쑥 묻더군요.

엄마한테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말하고 용서를 빌긴 했느냐고요.

순간 저는 멍해졌습니다.

대여섯 살 때의 일을 아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요?

하긴, 바보가 아니라면 언제 알아도 알았을 겁니다.

꽤 오랜 시간 우리 부부는 서로를 비난하고 변명해 왔으니까요.

그 시간 동안 애써 모른 척 하고 있던 아들이, 표면적인 평화가 찾아온 이제 와서 비로소 묻는 겁니다.

엄마에게 한번이라도 용서를 구했느냐고.

저는 그랬었다고 했습니다. 잘못을 빌었지만 그걸로는 충분치가 않았다고요.

그러자 아들이 딱 한 마디를 더하더군요.

그럼 또, 계속 빌어야 돼.’


그날 저는 아프게 깨달았습니다.

아들은 제 작은 어깨에 얹힌 불행한 엄마를 이제 그만 내려놓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러나 자기만 바라보는 외로운 엄마를 무사히 내려놓을 곳을 집안 어디에서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아내에게 털어놓고 싶습니다.

아들이, 당신에게 빌라고 했다고 말하고 아내 앞에 무릎 꿇고 싶습니다.

아들이 어떻게든 당신의 용서를 받아 오라고 했다고요.

그럼 아내도 마지못해 제 손을 잡아주지 않을까요?

아들의 손을 놓아주기 위해서라도 제 손을 잡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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