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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면 엄마랑 멀리 떨어져 살래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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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s****
2020-03-07
조회 15918
추천 22

 

바이러스는 사람들을 흩어놓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한곳에 묶어놓기도 하지요.

지금 여러분은 누구와 함께 발이 묶여 있습니까?

바이러스 덕분에 어떤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계신가요?

    

 아홉 살 손자의 말

 나는 결혼하면 엄마랑 멀리 떨어져 살래요. 

 

사람이 사람을 피해 다니는 요즘입니다.

만남도 모임도 전부 취소되고, 다들 각자의 집에 틀어박혀 뉴스에만 촉각을 세우고 있지요.

그러나 저는 요 며칠 그 어느 때보다 사람 냄새 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개학이 연기된 아홉 살 손자가 할머니와 함께 지내려고 와 있거든요.

뭘 해 먹이고, 어찌 놀아줘야 하나 싶어 막막했지만,

맞벌이하는 아들며느리의 절박한 사정을 생각하면 주저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를 거두는 일인 것을요.

 

그런데 손자와 사흘의 시간을 보내고 난 지금 드는 생각은,

요 녀석이 내가 해주는 밥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 내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러 왔나 하는 겁니다.

공부나 책에는 관심이 없고 놀 궁리만 한다고 며느리가 늘 걱정하기에

그저 좀 늦된 아이인 줄만 알고, 그 자체로 귀엽게 여겼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가져보니 고 녀석 여간 속이 들어찬 게 아니네요.

천진한 말 한 마디로 70세 할미를 들었다 놨다 하니 말입니다.

 

그 시작은 제 엄마 손에 이끌려 우리 집에 오던 첫 날부터였습니다.

출근길이라 잠시 들어와 앉지도 못하고 돌아서는 며느리를 배웅할 때였지요.

같이 오지 못한 아들의 안부가 궁금해, 그 와중에 제가 몇 가지 물어보았습니다.

걔도 열이 난다거나 어디 아프다는 소리는 없지? 밥은 잘 먹고?

혹시 마스크 답답하다고 맨얼굴로 그냥 다니지는 않니?

네가 자꾸 잔소리하고 챙겨줘해라.


며느리는 웃으며 걱정 마시라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준서를 맡아주셔서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를 하고 총총히 멀어져갔지요.

그런데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서 있는 내게 곁에 서 있던 손자가 뜻밖의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할머니랑 엄마랑 서로 아들을 맡긴 거네요? 그쵸?”

“....?”

 

활짝 웃고 있는 손자의 천진한 말 한 마디에 저는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네 엄마는 내게 아들을 잠시 맡겼지만 나는 며느리에게 아들을 맡긴 게 아니고 장가를 보낸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안 나왔습니다.

조금 전 내 행동은 영락없이 보모에게 어린 아들을 잠시 맡겨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고보면 저는 아들에 관한 것들도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 묻곤 합니다.

마치 보모에게 오늘 하루 아들의 생활을 묻고, 그 책임까지도 지우려는 엄마처럼요.

물론 그만큼 며느리가 미덥기 때문이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아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허를 찔린 기분이었습니다.

마음은 당장 바꿔 먹지 못하더라도 언행은 오늘부터 조심해야겠다 싶더군요.

아홉 살 손자한테 한 수 배운 셈이지요.

 

그런데 손자의 깨우침은 그 한 수로 끝나지 않고 곧 두 수가 되고 세 수가 되지 뭡니까?

이튿날 점심, 아이가 좋아한다는 카레를 만들어 먹이다가 또 한번 무릎을 탁 치고 말았습니다.

한 숟갈 한 숟갈 입에 떠넣으며 주고 받던 얘기가 어쩌다 거기까지 흘러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문득 손자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자기는 나중에 엄마랑 멀리멀리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요.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미래의 부인이 엄마랑 가까이 사는 걸 싫어할 것이기 때문이라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숟가락을 허공에 든 채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홉 살 아이가, 그것도 남자아이가, 벌써 고부간의 숙명적인 갈등에 대해 알고 있다니...

대체 누가 이 아이를 늦되다고 했나요?

 

그러나 다음 순간 착잡한 기분도 들더군요.

아이는 어디에서 그런 말을 들었을까요?

물론 티비만 틀어도 흔히 듣게 되는 얘기입니다만,

혹시라도 제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서 그런 감을 잡은 건 아닐까요?

지금껏 큰 문제 없이 잘 지내왔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

장남인 형네는 해외에 살고 있고, 지차인 저희가 홀시어머니와 가까이 살고 있는 상황이

며느리로서는 나름 힘들었을 수도 있지요.

속이 부대끼다보면 내색을 할 수도 있고, 부부간에 그런 말이 오갔을 수도 있겠지요.

혹시나 내가 아들 부부의 다툼거리가 되고 있는 건가 싶으니,

아이의 말이라고 그냥 웃어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랑 멀리 멀리살겠다는 말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 넌지시 물어보았지요.

 

누가 그래? 엄마랑 가까이 살면 부인이 싫어한다고?”

 

그러자 아이는 노란 카레가 묻은 입가를 입술로 쓱 핥더니, 해맑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하네요.

 

나도 내 부인의 엄마가 찾아오는 거 별로 안 좋을 것 같거든요. 우리끼리 재밌게 놀고 싶으니까요.”

 

, 정말 우문에 현답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내 마음을 짚어보면 상대의 마음을 아는 법입니다.

세상에 친구 엄마가 놀이에 끼어드는 걸 좋아할 아이가 어딨나요?

내가 싫으면 친구도 싫은 겁니다.

젊은 시절 나는 시어머니를 마음으로부터 따르지는 않았었습니다.

내 아들 역시 장모님께 유난히 잘 하는 그런 사위는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도 나는 내 며느리와 각별한 고부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대하든, 며느리에게 나는 친구의 엄마 같은 존재라는 걸 모르고 말입니다.

가끔은 며느리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실은 며느리가 나를 싫어하는 건가, 나하고는 안 맞는 건가 고민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유, 세상에 나는 우리 준서가 이렇게 똑똑한 아이인 줄을 미처 몰랐었네. 공부가 무슨 상관이고 학원이 웬 말이냐?”

 

나도 모르게 아이를 끌어 당겨 안으며 엉덩이를 두드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요 녀석이 그새 좀 친해졌다고 목을 끌어안으며 안겨드네요.

그러면서 내 어깨에 작은 턱을 얹고는 귓가에 대고 하는 말.

 

나도 할머니가 이렇게 심심하게 사시는지 몰랐어요.

 밤이 될 때까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내가 없었으면 매일매일 밥도 혼자 드시잖아요.”

 

아니야. 괜찮아. 할머니는 이런 영특한 손자가 있다는 것만 해도 배가 불러.”

 

할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내가 5학년이 되면요 가끔 혼자 놀러올게요.”

 

그래. 그래......”

 

나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혼자 웃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저희 집에 가서 같이 살자는 말은 하지 않는 깜찍한 녀석.

그러나 서운하지 않습니다.

요렇게 신통한 손자를 낳은 며느리가 신통방통할 뿐입니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2020년 봄을 손자가 언제까지 기억할지 모르지만,

저는 언제까지나 마음에 간직할 것 같습니다.

아홉 살 손자에게 허를 찔리고, 무릎을 치던 웃픈 추억을...

5학년이 되면 혼자서도 놀러오겠다던 눈물겨운 약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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