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다방으로 오세요! - 길을 막고 지나가는 사람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은 당신의 고민을 들어드립니다!

곰며느리 여우 며느리 (4)
839
mrs****
2020-01-19
조회 27882
추천 12

 


말만 잘하는 사람을 우리는 경멸합니다.

그러나 말이라도 곱게 해주는 사람에게는 스르르 넘어가지요.

진심이 가득한 순간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말 한 마디가 빛을 내는 건 2프로 부족한 진심을 메울 때입니다.

메우고 감싸고 어루만지는 말.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것도 분명 귀한 재능이겠지요.

 

 곰 며느리 여우 며느리


사람이 늙으면 도로 아이가 되나봅니다.

저희 시어머니는 생신이 설날 일주일 전이시라, 언제나 당신 생일은 따로 챙길 것 없이 명절에 얹자고 하셨었죠.

그러던 양반이 여든 넘으시고 갑자기 달라지셨습니다.

한달 전쯤부터 맏며느리인 저에게 날짜를 상기시키시며, 꼭 그 날짜에 생신상을 받고 싶어하셨습니다.

 

알고보니 그게 치매 초기증세였지요.

십 년 전, 아버님 돌아가시고 저희 집으로 오실 때에 이미 마음의 병이 싹트셨던가 봅니다.

다행히 아직 중증은 아니셔서, 멀쩡하신 날은 멀쩡하십니다.

하지만 한번씩 증세가 도지시면 식구도 몰라보세요.

그런 분이 당신 생일은 기가 막히게 기억하십니다.

얼굴도 못 알아보실 손자며느리와 증손주까지 불러 케잌에 촛불을 불고 싶어하세요.

 

미안하다. 바쁜 너를...”

아니에요, 어머니.”


큰며느리가 손자와 함께 케잌을 사들고 들어섭니다.

너는 그냥 모른 척 있다가 명절에나 오라고 해도, 불과 십오분 거리에 살면서 가만 있지는 못하겠던가 봅니다.

안방에 있던 남편이 슬그머니 나오더니 며느리 인사를 받습니다.

고맙고 미안한 얼굴이지만, 별 말은 없지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건 역시 동서입니다.

한 달음에 달려나와 조카며느리를 얼싸안으며 등을 쓰다듬습니다.


우리 질부 왔는가? 그새 더 이뻐졌네. 참 우리 형님은 복도 많아.

 요새 어디 이런 며느리가 있나요?

 질부가 이렇게 착하니까 조카 일도 잘 되고, 애도 잘 크는가봐.

 점심상 잘 차려놨으니까 한 술 뜨고 일어서. 설거지는 내가 할게.

 어디보자, 우리 장손! 나 누군지 기억나? 네 작은 할머니야~.”


동서의 한바탕 수선에 며느리는 넋이 나간 표정입니다.

아마 속으로 그러겠지요. 이 어른은 늘 좀 부담스럽다!

저는 혼자 웃습니다.

사십여 년 전, 저도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저보다 먼저 시집와서 이미 딸 하나를 낳아놓은 손아랫동서가 저는 부담스러웠습니다.

첫 대면 때부터 사람 혼이 쏙 빠지게 수선을 떨더니 만날 때마다 얼싸안고 쓰다듬으며

우리 형님, 우리 형님, 세상 듣기 좋은 말은 다 쏟아부어주니까요.

저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시부모님, 시숙 등 집안의 누구에게나 호호거리고 하하거리며

가려운 데를 긁어주듯, 듣고 싶은 말을 척척 해주는 겁니다.

너무 그러니까, 저는 오히려 좀 반대로 나가게 되더군요.

자연히 우린 극과 극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동서는 애교에 재롱 담당, 저는 부엌일과 돈봉투 담당.

 

억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내가 동동거리며 상 차려놓으면 동서는 어른들께 이것좀 드셔보시라, 저것좀 맛보시라 하며 살갑게 대접합니다.

수술 받고 마취에서 깨고 있는 어머님 뺨에 제 뺨을 부비며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지만,

돌아서서 병원비를 정산할 때는 뒷걸음질을 치지요.

그나마 맘껏 욕도 못하는 건, 우리 형님 최고라고 한껏 치켜세워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걸 말로 짓고, 말로 갚는 우리 동서.

그 청산유수의 말잔치만큼 상대방을 마음에 깊이 담아 두지는 않더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동서를 경계하고, 조금은 경멸했더랍니다.

 

동시에 둘째 며느리의 실체를 모르고 껌뻑 넘어가는 어머님 아버님을 서운하게도 생각했었지요.

옥석을 구분 못하시다니, 늙으면 바보가 되나보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작년 이맘 때, 장남이자 효자인 남편이 어머님을 집으로 모셔올 때도 내 맏며느리 십자가를 한탄하는 한편

통쾌한 기분도 들었답니다.

거 보세요. 결국 어머님을 책임지는 사람은 저잖아요.

입으로 백날 천날 찧고 까불어봐야 다 가짜라고요.

 

동서에 대한 생각이 조금이나마 달라진 건, 제가 시어머니 입장이 돼보고 나서입니다.

며느리 둘을 연이어 들였는데, 그 둘이 거짓말처럼 저와 동서를 꼭 닮았지 않겠어요.

큰아이는 말이 없고 우직한 반면, 둘째 요것은 방정맞도록 말이 많고 웃음도 눈물도 많습니다.

만나면 손부터 붙잡고 흔드는 둘째에 비해, 큰애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겉돕니다.

그러나 돌아서 집에 갈 때면 큰애의 문자가 오지요.

'어머니 가방 속에 제가 용돈 조금 넣어놓았어요~ '


저는 큰애의 마음에 억울함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쓴답니다.

칭찬도 많이 하고, 용돈이라도 한번 더 주지요.

오죽하면 동서가, 형님은 맏며느리를 더 이뻐하신다고 핀잔을 줄 정도로요.

그런데 말입니다.

진심을 말하자면, 둘째 며느리의 호들갑이 싫지가 않답니다.

그게 속 빈 강정인 줄을 알면서도,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늙어서 바보가 된 걸까요? 바보가 아니라 약해진 겁니다.

이젠 수선스런 환대를 받지 않으면 쭈뼛거리고 되고, 내가 싫은 건가 싶어, 주눅들게 되는 나이.

속은 그렇지 않다해도, 뻣뻣하게 대하는 사람에게선 냉기를 느끼는 나이가 된 거죠.

그러고보면 말을 예쁘게 하는 것도 큰 재능이고 그 나름 진짜 효도인가봅니다.

꼭 돈이 들고, 땀이 들어야 효도인가요? 타고난 재능으로 기쁨을 주는 것도 효도이지요.

 

지금 거실에서는 우리 둘째 며느리와의 영상통화로, 다들 야단법석입니다.

시할머님 생신 축하드린다고 한복 입힌 딸한테 노래를 시키고 있네요.

그 모습에 좋아서 어깨춤을 추는 우리 시어머니.

내 눈은 저절로 큰 며느리를 찾게 되더군요.

냉장고 옆에 붙어서서 거실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됩니다.

케잌에 봉투 들고 찾아온 나보다 멀리서 전화로 때우는 동서의 존재감이 더 두드러지는 이 묘한 상황이

딴에는 억울하겠지요.

 

나는 큰애에게 일부러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었습니다.

네가 애쓴다. 니 수고를 나는 안다. 음으로 양으로 네가 제일 고생이지.

그 말은 지난 사십년간 내가 어머님께 듣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해주셨다면 동서에 대한 미움도 한결 가벼웠을 텐데..

 

그때였습니다.

동서가 권하는 술을 한 잔 받아드신 어머님이 제 곁에 다가와 제 귓불을 당기며 귓속말을 하시네요.

 

저기 저 여편네는 누구냐?”

아유... 어머님 둘째 며느리잖아요.”

며느리는 무슨, 아주 불여우구먼. 너도 조심해. 서방 안 뺏기게.”

네에?”

쯧쯧... 너는 어째 약지를 못해. ~~”

댓글 4

댓글 쓰기
0/2000 byte
이전글
아내 마음의 0순위 (13)
다음글
겉다르고 속다른 게 고부관계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