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다방으로 오세요! - 길을 막고 지나가는 사람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은 당신의 고민을 들어드립니다!

길을 묻는 그녀에게... (4)
835
mrs****
2019-11-23
조회 18713
추천 6

 

길을 잃고 헤매는 내게 누군가 길을 묻습니다.

출구를 알려 달라 간절히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알지도 못하는 길을 그에게 성의껏 알려줍니다.

오른쪽으로 열 번, 왼쪽으로 스무 번 꺾으라 말합니다.

그의 등을 떠밀며, 쉼 없이 가라 말합니다.

마치 그 길 끝에 출구가 기다리고 있다는 듯.

  


그 길 끝엔 어차피 아무것도 없지만.


  

언니, 자요?’

자정이 넘은 시각에 메시지를 보낸 건 역시 그녀였습니다.

아니, 안 자.’

나는 그렇게 답을 보내놓고 그녀의 다음 메시지를 기다리는 중이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꺼져 있던 부엌불이 딸깍 켜졌습니다.

놀라서 퍼뜩 돌아보니 잠든 줄 알았던 남편이 잠이 덜 깬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더군요.

나 때문에 놀란 듯, 몇 초간 눈을 꿈벅이던 그는 안 잤어?’ 하고 꿈속인 것처럼 물었고

나는 또 잠꼬대 같은 목소리로, ‘자야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남편은 그대로 말 없이 냉장고로 다가가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더군요.

그러고는 조용히 자기 침대로 돌아갔습니다.

덕분에 환해진 부엌식탁에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펼쳐들었지요.

그러나 아직 아무 말이 없는 그녀.

정화도 나처럼 불 꺼진 부엌 식탁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까요?

 

청명한 가을날의 토요일인 오늘, 나는 후배 정화를 만나,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좋은 데 데려가 밥을 사겠다며 그녀가 집까지 나를 데리러 왔지요.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으니, 좀 멀리 간다고만 하더군요.

멀면 어떠랴 싶었습니다.

육 년간을 이웃으로, 자매처럼 지내다 작년에 이사를 간 정화.

그녀와 함께 하는 오랜만의 외출인 걸요.

우린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거리를 달려 복잡한 시내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녀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어느 식당을 찾아서.

 

정화를 만난 건, 7년 전 문화센터의 어떤 강좌에서였습니다.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지요.

우리가 같은 아파트 같은 동의 이웃이라면서요.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머나, 저렇게 예쁘고 화사한 사람이 우리 이웃 중에 있었다고?


나는 첫눈에 그녀가 좋았습니다.

내가 남자였다면 바로 저런 타입의 여자에게 반했을 것 같았습니다.

그녀도 스스럼없이 언니라 부르며 저를 따르더군요.

나이는 한참 아래였지만, 그녀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일과 살림을 야무지게 하는 재주꾼이면서, 겸손하게도 내게 자주 묻곤 했죠.

언니,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거예요?

 

그런 그녀와 오늘 식사를 하고 왔습니다.

분위기 좋은 식당이었고, 음식도 맛있었지요.

그런데 저는 그 맛을 즐길 수가 없었습니다.

뭐가 나왔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몹시 당황했습니다.

우리를 맞아 준, 정화의 친구라는 사람 때문이었지요.

그는 뜻밖에도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습니다.

동창이라기에 처음엔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와 마주앉아 식사를 하는 동안 미심쩍은 생각은 점점 더 굳어져 갔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는 정화를 애인처럼 대하고 있었습니다.

애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애인의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게다가 나에 대해서도 꼭 애인의 언니를 대하듯 하는 겁니다.

정화는 그런 그를 내버려두고 있더군요.

두 사람은 내 앞에 나란히 앉아서 그런 이상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정화에게 이런 수상한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나를 이 자리에 데려온 이유가 뭔지, 그 점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진 못했습니다.

식사를 마쳤고, 그 남자가 모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자리를 옮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지하철 역 표시를 보고야, 퍼뜩 정신이 든 듯 날 좀 내려달라고 말했죠.

어색한 핑계를 대며, 집에 급히 가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화는 나를 붙잡으려는 듯 따라 내렸지만 굳이 붙잡지는 않더군요.

 

집에 돌아와 밤이 늦도록, 나는 정화의 전화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전화벨이 울릴까봐 조마조마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에게서 듣게 될 설명이 두려웠거든요.

내가 아는 정화는 사는 게 권태로워서 탈선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결혼생활이 토대부터 무너지지 않고는 저런 행동을 할 리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느닷없던 이사부터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들 부부에겐 아마도 무슨 일인가 벌어진 듯 했습니다.

어쩌면 정화가 먼저 배신을 당한 걸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내 물음에 답을 하듯, 손 안의 휴대폰이 지잉 울렸습니다.

정화는 잠시 침묵하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언니. 저 지금 잘못하는 거 맞죠? 아무리 분해도 이런 식으로 갚는 건 안 될 일이죠?”

 

정화야.”

 

야단쳐 주세요. 너 미쳤냐고 욕해 주세요.”

 

그녀의 마지막 말은 잊고 있던 십여 년 전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정화를 만나기 전, 마흔 몇 살, 아직 젊었던 내 마지막 몸부림의 순간들.

그때 나는 길가는 행인이라도 붙잡고 부탁하고 싶었죠.

정신 차리라고 욕 좀 해주세요.

 

정화야. 난 널 욕해줄 수가 없어.

 한때는 나도 배신감 때문에, 원치도 않는 남자를 만들려고 기를 쓰고 돌아다녔었으니까.

 복수라기보다는 뭔가를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어.

우리의 소중한 결혼을, 나도 얼마든지 훼손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

너만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그런데 끝내 적당한 사람을 찾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물불 가릴 것이 없었는데, 정말 사람이 없더라고.

그 사이 시간은 갔고, 난도질당한 결혼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어.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이들이라도 지킬 수 있었음에 지금은 겸허히 감사할 뿐이야.”

 

그러나 그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정화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제 자리를 지키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려봤자, 얻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고 말도 해줘야 하지 않나?

죽었다 되살아난 나의 결혼은 결국 흉터 투성이 추물이 되어 있더라고 말해줘야 하지 않나?

아니, 애초에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나와 다른 사람이니까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똑똑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내 입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더군요.

선배로서 내가 마땅히 해줘야 하는 말, 나 자신조차 믿지 않는 아름다운 말들을 계속 쏟아내고 있는 겁니다.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온 타인들의 말을...

 

제발 정화야. 넌 충분히 아름답고, 가치 있어.

무가치한 일에 너를 낭비하지 마. 너 자신을 되찾아.

네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해.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생각해. 이혼을 하든 안 하든, 네 자리는 지켜.

어떻게든 시간은 가고, 상처는 아물어. 시간은 네 편이야.

여자로서의 너는 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결코 늦지 않아.

 

 

 

 

 

댓글 4

댓글 쓰기
0/2000 byte
이전글
잊을 수 없는 사부인의 민낯 (7)
다음글
부러워요 형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