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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크10년. 이제와 아이 낳자고 하면...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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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s****
2019-06-03
조회 16820
추천 4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는 어린애들이 귀엽다는 생각을 안 해봤습니다.

우는 아기는 시끄러워서 싫었고,

뛰는 애들은 번잡스러워서, 학생들은 위태위태하고 버릇 없어 보여서 예쁜 줄 몰랐습니다.

 

성향이 그래서인지, 결혼하고도 아이 없이 십년입니다.

아내가 아이를 안 갖고 싶어했고, 저도 이의가 없었지요.

 

제 또래 친구들 보면 아이 낳아서 초등학생까지 키우느라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중이더군요.

즐거운 지옥이랄까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저는 마음의 동요 같은 건 없었습니다.

너희들은 즐거운 지옥에 살아라, 나는 심심한 천국에 살겠다!

그렇게 생각했고, 부모님이 걱정하실 때도 그 말씀이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제가 전에 없던 경험을 하면서 마음이 좀 어지럽습니다.

 

큰조카가(큰 형의 아들) 작년에 서울로 대학을 왔습니다.

지방에서 인서울 진학이 힘들다던데, 나름 명문대를 왔더라고요.

무슨 단체에서 장학금을 받고, 학생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형님 내외도 마음을 놓고, 저 역시 마음이 놓였죠.

 

게다가 기특하게도 그 녀석이 부모님 부담 덜어드린다며 아르바이트도 하고 싶다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운영하는 가게에, 편한 시간에 와서 일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중학생 된 뒤로는 얼굴 보기 힘들었던 조카를

거의 매일 잠깐이라도 보게 되었는데,

이렇게 귀엽고, 대견하고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인사성도 밝고, 맡은 일을 아주 열심히 합니다.

무엇보다도, 형편이 어려워 학원도 못 보내준 부모님을 전혀 원망하지 않더군요.

흙수저라서 희망 없다는 생각도 안 합니다.

무조건 열심히 노력해서, 부모님이 기뻐하실 만큼 자리 잡겠다고 합니다.

 

그런 자신감 때문인지, 벌써부터 좋다고 따라다니는 참한 여학생도 있더군요.

참 그 녀석 보는 재미로, 제가 요즘 살 맛이 납니다.

 

그러다보니, 평생 처음으로, 자식이 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저렇게 잘 자란 자식이 있으면 얼마나 든든할까 싶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나도 아이를 하나 낳아볼까도 싶고요.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어렵다는 걸 압니다.

제 나이 이미 사십대. 아내도 마흔입니다.

작정을 한다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그 아이가 우리 조카만큼 반듯하고 건강하게 나올지도 자신없지요.

 

더 큰 문제는 아내의 반발입니다.

저보다 더 확고하게 아이를 원치 않거든요.

아이가 없다보니, 계속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일을 그만두었는데, 제가 지금 아이 낳자 소리를 하면,

화를 낼 것 같습니다.

일 안 하니 애라도 낳으라는 거냐고요.

 

어쩌면 아내는 눈치를 좀 챈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조카한테 잘 하는 걸 은근히 싫어합니다.

처음엔 조카를 바라보는 제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고 놀리기도 했는데

이젠 그런 소리조차 안 합니다.

 

제가 요즘 가만히 돌아보면, 저는

아이를 낳아서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제 자신도 행복하지 않았고요.

그래서 아이들을 보며, 제 자신의 우울한 기분을 투사했던 것 같습니다.

제 아내도 비슷한 케이스입니다.

부유하게 자랐지만, 어린 시절 정신적인 상처가 많다 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떠올리면, 안 됐다는 생각, 비참하다는 생각부터 떠오른다고요.

 

어쩌면, 용기를 내어 자녀를 가져보는 것이

우리 두 사람의 마음에 힐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내도, 그 기분을 경험해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잖습니까?

(워낙 자상하고, 살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아이를 방치하거나 학대할 리는 없습니다.)

 

바람도 늦바람이 무섭다던가요?

남들 다 지나온 걸, 이제야 느끼는 제 마음이 어수선합니다.

그냥 이대로 입다물고 세월만 가라 하는 것이 답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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