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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진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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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s****
2019-01-05
조회 25168
추천 5

아버지의 마음을 정말로 아는 건 어머니뿐입니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아이를 두 팔 벌려 받아내던 젊은 아빠를 기억하는 한 사람이니까요.

아버지의 품은 언제나 그렇게 열려 있음을 아는 한 사람이니까요.



아버지의 진심


여보, 올 한해 착하게 살았어요?”

나야 늘 법 지키며 양심적으로 살지.”

그럼 싼타한테 선물 받을 자격 있네.”

일흔 살 할배도 선물이라는 말에는 솔깃해지나 봅니다. 아닌 척 하지만 제 말에 은근히 귀를 기울이네요.

크리스마스 날, 딸내미가 집에 온대요. 신랑감 데리고...”

나이 먹는다는 것은 느려지는 겁니다.

제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남편의 귀로 들어가, 뇌에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저는 하나, , 셋 세곤 하죠.

게다가 남편의 반응이 말이 되어 나올 때까지는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은 족히 더 필요한 줄 알기에,

저는 포트에 찻물부터 끓입니다.

제게는 선물 같은 소식인데, 남편한테는 어떨까요?

우린 일심동체니까, 결국은 같은 마음이겠죠.

하지만 고집 센 남편이 자신의 진심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는 어쩌면 이런 말부터 할지 모르겠네요.

선물은 무슨. 가서 잘 살아야 선물이지!”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암요. 백번 맞는 말씀! 그런데 이번엔 잘 살 거예요. 느낌이 좋아요.”

 

남편이 법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저는 느낌대로 사는 사람이 맞을 겁니다.

십년 전, 딸아이가 갑자기 결혼한다고 했을 때, 저는 느낌이 좋지 않아 선뜻 찬성을 못했지요.

어째 서로가 서로를 재촉하는 것 같고, 뭔가에 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떨쳐낼 수 없어,

시간을 좀 가져보라고 했었지요.

하지만 딸은 제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그 급한 결혼이 잘못되어 삼 년을 못 채우고 갈라선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남편이 받아들이지 못하더군요.

노력도 안 해보고, 이혼은 안 된다는 겁니다.

노력해보았다고 해도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부부간의 신뢰가 이미 깨졌다는 딸의 말에 남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하는 부부관계는 환상이라고 했습니다.

나도 네 엄마를 속인 적이 있다고, 신뢰를 제로에서부터 다시 쌓아나가라고,

뼈아프게 속고도 기회를 주는 게 부부라고 했습니다.


물론 옳고도 맞는 말입니다.

딸의 이혼을 받아들이기가 괴로운 건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처음 부딪힌 인생의 벽 앞에서 힘들어하는 딸을 보며 무조건 남편과 한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믿음과 애정이 아닌 노력으로 평생을 사느니 자녀가 없을 때 각자 자유로운 길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한편으로 남편에 대한 반발심도 들었습니다.

이혼을 실패라고만 생각하고 실패한 자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서,

어쩌면 부끄러운 내 모습을 보았기에, 더욱 아닌 척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이 반대하는 만큼, 저는 보란 듯이 지지했죠.

우리 부부는 그렇게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며 자식을 더욱 혼란스럽게만 했답니다.

 

딸은 결국 돌아왔고 우리 곁에 잠시 머물다 곧 독립해 나갔지요.

그 뒤로 자기 일에 열중하며, 마음을 추스르는 듯 보였습니다.

가끔 제가 딸에게 기죽지 마. 무슨 잘못했어?’ 라고 말하면 딸은 피식 웃으며,

‘잘못은 했지. 불효에, 실패에, 여러 사람 놀래키고...’ 합니다.

듣기에 애잔했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은 회복이 되었다는 뜻으로 여기고, 저는 차라리 한시름 놓곤 했죠.

 

정작 회복이 더뎠던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였습니다.

불효라는 말로 슬쩍 피해가지만, 딸아이에게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남았을 겁니다.

가장 힘들 때 부모에게서 지지를 받지 못했으니까요.

외모부터 성질까지 빼다 박은 듯 닮았고, 그래서 말없이도 잘 통하던 부녀가

그때 이후로는 거리를 두며 속을 감추는 게 확연했습니다.

이번에 남자친구를 인사시키겠다고 말하면서도, 아버지 얘긴 아예 꺼내지 않더군요.

그 침묵 속에서 저는 느꼈습니다.

딸이 아버지에게서 다시 상처받을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요.

부녀간의 마음의 거리가 이토록 멀어져 있었음에, 저는 새삼 놀라고 슬펐습니다.

누구보다 딸의 행복을 바라는 이가 아버지인데, 딸은 이제 그 마음을 모르겠나 봅니다.

 

찻물이 다 우러났는데, 그새 남편은 술 한 병을 돌려 땁니다.

말없이 한 잔 들이키더니, 마침내 말문을 엽니다.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역시 같은 말을 하겠지. 무조건 더 노력해 보라고.”

남편의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를 몰라 술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고, 내 잔에도 따랐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또 잘못된다면...”

무슨 말예요. 이번엔 느낌이 좋다니까. 난 벌써 사진도 봤는데 인상부터가...”

두 번 실패는 안 되는 거라서, 억지로 참고 살지는 말라고 해. 절대 그러지 말라고 당신이 말해줘.”

남편은 두 번째 잔을 고개젖혀 털어 넣으며 눈을 감습니다.

남편에게서 흘러나온 말이 제 귀에 들어와, 뇌에까지 도달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지만,

그 말이 마음에 확 퍼지며 눈물 한 방울을 밀어올리는 건 순간이더군요.

 

여보. 당신이 직접 그렇게 말해줘요. 예전처럼 딸한테 편지라도 한 장 써서 줘 봐요.”

뭐라고 써. 살아보고 시원찮으면 돌아오라고?”

왜 아녜요. 아니다 싶으면 냉큼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라고 써줘요. 그게 당신 진심이잖아.”

남편은 빈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고개를 숙이더군요.

그렇게 고개 숙이는 모습은 저만 아는 남편의 모습입니다.

미울 때도, 갑갑할 때도 무수히 많았던 남자이지만 내 앞에서 저렇게 고개 숙이면,

더구나 자식 일로 고개 숙이면, 그 말없는 후회와 자책이 안쓰러워 저절로 손을 잡아주게 되는...

내 딸도 언젠가 이런 마음을 알게 될 날이 있을까요?

결국 이런 게 결혼의 의미이고 부모의 마음임을 깨닫게 될까요?

 

문득 남편이 고개를 듭니다.

그새 굳게 다문 아버지의 얼굴이 되어, 세 번째 잔을 채우며 제게 불쑥 묻습니다.

부러 헛기침을 하고, 우렁우렁 큰소리를 내며, 내 귀에도 익숙한 아버지의 목소리로.

아버지한테서만 들을 수 있는 그 거칠고 굳세고 따뜻한 목소리로...

 

그래, 대체 어떤 녀석이래? 당신 느낌 말고 사실대로 한번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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