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다방으로 오세요! - 길을 막고 지나가는 사람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은 당신의 고민을 들어드립니다!

30년전 목소리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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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h****
2018-10-26
조회 8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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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핸드폰 진동이 울려서 받았습니다. 고객 전화려니 하고 무심코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한 이초쯤 지난 후 여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데 주위가 시끄러워 잘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여보세요, 죄송한데 조금 크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어차피 통화를 하려면 주위 소음을 피해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기에 엉거주춤 일어서며 상대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저쪽에서 이번에는 조금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ㅇㅇㅇ예요"

순간 내 눈앞으로 노란색 섬광이 휙하고 지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누구시라고요?" 내 귀에도 내목소리가 헝클어져있었습니다.

저쪽에서 다시 한 번 확인 해주었습니다.

"ㅇㅇㅇ예요"

이거 뭐지? 정말인가?

동료들이 웬일인가 싶어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저쪽에서도 내가 당황함을 느낀 것 같았습니다.

불편하시면 전화 끊을게요

아닙니다, 주위가 시끄러워 나가서 받을 테니 끊지마세요

그리고 식당 밖으로 나와 그녀와 통화를 했습니다.

 

1984년 초가을 입니다. 회사를 다니며 대학원에 다닐 때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물론 그때 나는 결혼을 했었고 큰놈이 유치원에 다녔습니다.

저보다 15살이나 어린 눈 동그란 그녀를 처음엔 장난처럼 만났습니다.

내말이나 알아들으려나 했는데 의외로 말이 잘 통했고 관심사도 공통점이 많아

제법 논쟁의 상대가 되었습니다. 논쟁거리를 만들어 일부러 억지를 피우면 나를

설득시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귀엽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런 재미에 자주 만났습니다.

 

남녀 관계는 한계를 설정한다는 것이 무의미했습니다. 관계설정 시도가 첨부터 내 스스로

도덕적 면피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날 우리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던 관계에서 불행한 남녀관계로 변했습니다.

유부남과 처녀의 만남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상처의 크기가 커집니다.

우리는 7년이라는 시간을 만나고서야 헤어졌습니다.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내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뭐냐고 물으니 나 오늘 ㅇㅇㅇ 이라는 여자를 만나고 왔어라며 그녀를 만난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녀가 집으로 전화를 해서 아내를 만나자고 했답니다. 그리고 만나서는

나를 사랑하니 사모님께 죄송하지만 이혼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만나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우선 애 아빠가 이혼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고 둘째는 애들이

어린데 나 혼자 키울 능력이 없으니 애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릴수 있다면 내가 애

아빠를 보내 주겠노라 말했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내게 이혼을 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답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한테도 잘못을 했고 그녀 한테도 잘못을 했다. 두 사람한테 모두 사죄를 하고

책임을 지고 싶지만 그렇게도 할 수 없지 않느냐. 이 문제는 당신이든 그녀든 둘 중 한명에게

무책임해져야 온전히 다른 한명을 책임질 수 있는것아니냐 그런데 난 그 선택을 솔직히 못하겠다

아내는 알겠다며 자기가 그녀를 만나서 얘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마무리를 하겠다고 말하고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가 먼저 나보고 헤어지자고 말하며 자기가 20년을 기다리릴 수 있다면 그때 만나자며 

이제 더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후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4년쯤 지난 어느 날 오후 회사로 전화가 왔습니다. 그녀였습니다.

몇 일후 결혼한다고 그러니 20년 후에 만나자는 약속은 잊어버려도 된다고. 그리고 또 이십 몇 년이 흘렀습니다.

몇 년전 어느 날 내가 그녀 얼굴 모습을 떠올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많이 뻔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식당 밖에서 잠시 동안 통화를 했습니다.

잘살죠?”

네 잘살아요.

어디 살아요?”

어디 안가고 살아요.”

내 핸드폰 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가 크크 웃으며 답했습니다.

인터넷에 이름 검색하니까. 수두룩하게 나오던데요

내가 지금은 오래 통화는 못하니 이따 사무실 들어가서 전화할게요

 

다시 식당에 들어와 밥을 먹었습니다. 무슨 맛인지, 뭘 먹고 있는지,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했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와 다시 통화를 했습니다.

그녀가 내게 한 말은 이렇습니다.

갑자기 전화해서 당황스럽게 만들어 미안하다.

꼭 한번 만 얼굴이 보고 싶어 전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다섯 시간을 운전해서 그녀를 만나러 갔습니다.

23년의 시간이 지나 조그만 도시였던 곳이 번화가가 되어있었습니다.

약속장소를 잘못 찾아 운전을 하면서 두리번 거리는데 저만치서 걸어가는

여자 뒷모습이 그녀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대충 차를 길가에 대고 불렀더니

뒤돌아보는데 그녀였습니다.

 

그렇게 30만에 만난 그녀는 이제 중년의 여인이었지만 그래도 그때의 모습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었습니다. 웃는 입모양, 어린애처럼 서투른 젓가락질은 그대로였습니다.

두 시간 남짓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혼해서 아기를 낳고 몇 년후 이혼을 했답니다. 다시 공부가 하고 싶어 중국으로 유학을 갔었다고

자기가 늦어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건 나를 닮고 싶어서 였다고, 그리고 열심히 살았다고

이제 아들도 장성해서 취직을 해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주 밝고 씩씩해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이유없이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미안하다고 정말 내가 당신 삶에 훼방만 놓고는 보상도 못하고 도망치듯 떠나서 면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괜찮다고 자기는 나를 만난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지만 자기 차로 가겠다며 악수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밤길을 운전해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를 만나고 온 일이 마치 꿈을 꾼 듯 몽롱하게 느껴졌습니다.

 

다음날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걱정했었어요 변했으면 어쩌나 하고요.

그런데 하나도 안변했네요. 얼굴도, 말투

옷 입는것도 그대로예요.

나는 이제 맺힌 걸 다 풀었어요,

고맙고 감사해요, 나의 선생님

 

30년의 세월이 흐르기 전에 나는 죽겠지만

그래도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할수 있었고

그녀가 맺힌걸 풀었다니

그게 어딥니까.

 

언제나 지금처럼 밝고 씩씩한 여인이 되길

빌어드립니다.


아내에게 이번일을 얘기해줘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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