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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바람 이후 사는 게 편해진 나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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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s****
2018-04-13
조회 27730
추천 15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합니다.

그러나 그 결혼을 지켜주는 건 신뢰입니다. 신뢰가 깨지면 사랑 따위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오는 마지막 구원이 있습니다.

바로 연민이죠.

신뢰가 칼질 한 번으로 툭 끊기는 밧줄이라면, 연민은 두 사람을 친친 감은 투명한 거미줄입니다.

어떤 칼로도 완전히 끊어낼 수는 없는...

 

늦은 밤,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자니, 부엌에서 달그닥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아들이 야식을 찾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죠.

하지만 그 순간 아니지, 싶더군요.

아들은 내일 일찍 깨워달라 말을 남기고 벌써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부엌에서 도둑고양이 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남편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다시 몸을 눕혔습니다.

달그닥, ! ! 스텐 냄비에 물받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라면이라도 끓여먹으려나 봅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수요일. 일주일 중, 남편의 업무가 제일 바쁘게 돌아간다는 날입니다.

저녁을 5시에 먹어야 하는 날이라니 시장할 때도 됐죠.

타타타타! 타타타타! 부엌에서는 가스 스위치 소리가 몇 번이나 헛되이 들려옵니다.

저는 이불을 쓴 채 입속말을 중얼거립니다.

밸브부터 돌려야지 이 아저씨야.....

 

예전의 저였다면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남편이 가스불 켜는 소리를 침대에 누워 듣고만 있다니요.

벌써 달려가서, 남편을 부엌에서 내보내고, 뭐든 먹을 만한 밥상을 뚝딱뚝딱 차려냈을 겁니다.

그 시절의 저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남편이 입맛을 다시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김밥을 말고 국수를 삶는 여자.

물잔 들고, 수건 들고, 양복 팔에 걸고 남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여자.

휴일이면 남편 얼굴에 팩 붙여놓고 손발톱 깎아주고, 내친 김에 족욕까지 준비하는 여자.

그렇게 어떻게 십수 년을 살았는지...

 

그 때의 저라면....

오늘 하루는 아주 달랐을 겁니다.

아들과 둘이 저녁을 먹으며 남편이 목에 걸렸을 겁니다.

여보! 바빠도 식사는 거르지 말라고 문자라도 보냈겠죠.

추적추적 밤비가 내리는 걸 보고는 또 한 번 메시지를 보냈을 겁니다.

태우러 갈까요?’

그리고 물론 저는 갑니다.

오지 말라고 해도 갑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보온병에 담아 회사로 갑니다.

거기서 기다렸다 남편을 태우고, 비오는 밤길을 차를 나눠 마시며, 같이 라디오 들으며 돌아왔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어땠나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비 내리는 창밖을 멍하니 보며 잠시 생각했을 뿐입니다. 비 맞으며 오겠군!

아들 잠들고는 저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이미 잠들었다 생각하고 나가보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내 방문 앞에서 3초쯤 서 있다가 자기 방으로 가더군요.

그리고 곧 샤워기 물소리. 그 소리를 먼 데 빗소리처럼 들으며 저는 진짜 잠이 들었죠.

부엌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릴 때까지 말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세상 편하게 사는 여자입니다.

수험생 아들 녀석 말고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습니다.

주부로서 기본만 할 뿐, 잘 하려고 애태우지 않습니다.

사는 게 편해지니 평생 안 찌던 살이 다 찌더군요.

사람들은 저더러 얼굴 좋아졌다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묘합니다. 내가 예전엔 그렇게 메말라 보였었나?

그렇다면 참 아이러니컬합니다.

왜냐하면, 저한테는 그 시절이 가장 촉촉하던 시절이니까요.

살찔 틈이 없도록 동동거리며 살던 그때가 오히려 힘이 남아돌았습니다.

잠이 부족해도, 손발이 부족해도, 웃음이 났죠.

왜냐하면 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여자였으니까요.

착하고 성실한 남편에게 사랑을 받는 아내였으니까요.

 

그 행복을 놔버린 건 2013년 가을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행복이 깨졌다면, 저는 그렇게 무참히 꺾이지 않았을 겁니다.

깨진 조각들을 필사적으로 이어붙여 나만의 행복으로 소중히 간직했겠죠.

하지만 저의 행복은, 애초에 가짜였던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남편의 마음이 다른 여자에게 가 있었으니까요.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습니다.

그만큼 저는 남편을 믿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최악의 방식으로 깨졌죠.

저는 남편이 쓴 메일을 우연히 봤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별을 얘기하고 있더군요.

차라리 미사여구로 도배가 된 유치한 편지였다면 웃어넘길 수 있었을까요?

남편은 딱 두 가지만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들 때문에 우린 절대 안 된다. 그리고 내 아내라는 여자가 너무 불쌍하다.

 

불쌍한 여자. 불쌍해서 버릴 수가 없는 여자.

그게 제 행복의 진짜 이름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일 년을 울고, 싸우고, 도망가고, 화해하고, 다시 내쫓고... 지옥같이 살았습니다.

하지만 끝내 이혼하지는 못했죠.

남편은 지금도 우깁니다. 그 편지는 착시를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잘못은 인정하지만, 그렇게 깊은 관계도 아니었고, 오히려 부담스러워서 근사한 말로 떼어내려는 것뿐이었다고.

 

그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말을 그렇게 하니 이혼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럼 좋다. 그냥 이렇게 재미없이 살아가는 수밖에.

저는 남편에게 내주던 것들을 하나 둘 철회했습니다.

로봇이 되어 살림만 합니다.

처음엔 복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아닙니다.

도저히 잘해줄 수가 없습니다.

불쌍한 여자라는 말이 머릿속에 뱅뱅 돕니다.

예전에는 즐거워서 발을 씻겨줬는데, 이제 그러라면 모욕감만 느낍니다.

저는 마치, 둘로 쪼개진 느낌입니다.

남편이 현관문을 열면, 제가 아는 예전의 저는 남편을 반겨 달려나갑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등 돌리고 모른 척 하죠.

제가 조금만 풀어지면 남편은 입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 저는 얼른 또 등을 돌리죠.

 

남편은 지금 자기가 혹독한 벌을 받는 줄 압니다.

십년 쯤 지나면 제 마음이 풀릴 줄 압니다.

하지만 그럴까요? 그럴 수 있다면 저도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누군가를 위해 동동거리고 살아야 행복한 여자입니다.

생겨먹길 그렇게 생겨먹은 여자입니다.

그런데 사랑하고 존경할 대상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 찾아나설 수도 없습니다.

 

살며시 방문을 밀고 나가보니, 남편은 소파에 잠이 들어있습니다.

금방 라면을 먹었으니, 식도염이 걱정되어, 바로 눕지도 못하고, 기대 앉아 코를 고네요.

냄비는 개수대에 소심하게 들어앉아 있습니다. 물까지 받아놓았네요.

예전의 남편 같으면 젓가락 내던지고 나몰라라 했을 텐데...

남편도 변했습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는 알까요?

 

봄비 오는 이 밤, 예전의 내가 눈물겹게 그리워 몇 자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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