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다방으로 오세요! - 길을 막고 지나가는 사람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은 당신의 고민을 들어드립니다!

철들어 돌아온 남편인 줄 알았는데... (15)
583
mrs****
2017-04-17
조회 23506
추천 9

신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요즘 들어 생각이 바뀌어갑니다.

신은 있는 모양입니다.

착한 사람 복주고 못된 사람 벌주는 신은 아니고,

묘하게 사람 인생을 가지고 노는 듯한 운명의 신 말입니다.

 

저는 평생 남편을 거둬먹인 여자입니다.

결혼직후 아이가 생겼고, 아이를 낳기도 전에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더군요.

물론 그 때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전부 핑계입니다.

타고나기를 게으르고 나약해서

한 군데 엉덩이 붙이고 끈질기게 일을 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일 년 이상 일정하게 일을 해본 적이 없어요.

 

아마 결혼을 할 때는 뭐에 미쳐서 했겠지만

삶이 부담스러워지자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던 거죠.

 

그 뒤로 남편은 생활비를 갖다 주다 말다, 어떨 때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가져가곤 했죠.

빚도 여기저기 깔아놓고, 사고도 내고...

생활도 불규칙하고, 행방도 곧잘 묘연했습니다.

 

그런 남자를 왜 여지껏 데리고 살았느냐고 하시겠죠?

누군가는 그러더군요. 이혼도 이혼수가 들어야 한다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실제로 이혼을 하려고 들면

이상하게 또 상황이 좀 바뀌어서, 실낱같은 희망이 생깁니다.

그 희망에 매달려 아등바등하다가 기진맥진 해 버리면

남편은 한동안 눈앞에 안 나타나, 혼자나 다름 없이 살기도 했습니다.

헤어지고 결판내는 것도,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데

저한테는 그게 없었나봅니다.

 

그 대신 저는 다른 쪽으로 독해지고 영악해졌습니다.

기댈 데가 없으니까, 이를 악물고 돈버는 일에 매달리게 되더군요.

그 와중에 밑천을 모아 작은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큰 돈은 벌지 못했지만, 그나마 애들 공부시키고 집 한 칸은 마련할 수 있었어요.

지금 아들은 해외에 유학을 가 있습니다.

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어미로서 작게나마 보태줄 수 있었다는 것이

제 평생의 자랑입니다.

 

자식이 힘찬 날갯짓으로 둥지를 떠나니 제 마음도 후련하더군요.

이제는 굳이 남편과 인연을 이어갈 이유가 있을까요?

여전히 자기밖에 모르고, 밖에서 혼자 즐기고 다니며

마누라 지갑이나 털어갈 궁리를 하는 위인을

내가 왜 거둬먹여야 하죠?

남편과 헤어져서 무슨 대단한 자유를 누리고 살겠다는 건 아이에요.

그냥 눈앞에서 속썩이는 거 보지 않고,

누군가에게 착취당한다는 생각 없이, 맘 편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홀로서기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까요?

남편이 순순히 헤어져 주겠어요?

나이는 먹었지, 벌이는 없지,

남은 거라고는 놀던 가락뿐인 남자가

돈 대 주고, 밥 해주는 여자한테서 물러나 주겠어요?

 

그런데 그 상황에, 바로 이 등장했습니다.

제 생각을 꿰뚫어본 듯, 남편의 행태도 다 꿰뚫어본 듯

신이 장난을 치더군요.

제가, 몹쓸 병에 걸리게 된 겁니다.

암이라는 말에 저는 실감이 안 났어요.

항암치료를 먼저 받고, 수술도 받아야 한다는 말에 헛웃음이 나왔어요.

그런데 병의 원인 중에는 스트레스도 포함된다는 말에

저는 마침내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어떻게 병이 안 나요.

그렇게 속 썩으며 아등바등 살았는데요.

그나마 이렇게 늙을 때까지 몸이 성했던 건,

자식을 키워서 세상에 내놓으라는 의미였겠죠.

 

저는 아들에게 병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고령의 부모님에게도, 친정 오빠 내외에게도 알리지 않았어요.

기막히게도, 제 병을 알게 된 건 웬수 같은 남편 뿐이었습니다.

애초에 제가 쓰러져서 119를 부른 게 그 사람이었거든요.

 

저는 이 일로 남편과도 자연히 갈라지고,

홀로 투병생활을 하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어차피 홀로 걸어온 길, 닥치면 다 된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제 병을 알게 된 뒤로,

뜻밖의 변화를 보이더군요.

 

수십년 결혼 생활에 처음으로, 남편이 집에 붙어 있는 겁니다.

밥을 하고 빨래를 돌리고, 제 약을 갖다 주네요.

병원도 따라가 주고요.

 

고맙다기 보다는 신기했습니다.

밥도 할 줄 아는구나. 빨래도 널 줄 아는구나.

하지만 얼마나 오래 갈까요?

벼룩도 낯짝이 있으니, 하루아침에 도망가진 못하는 거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몇 달을 그렇게 잘도 버티더군요.

저를 위로하지도 않았고, 살갑게 대해주지도 않았지만,

간병인 노릇은 웬만큼 했습니다.

주위에서도 놀라고, 저도 놀랐습니다.

철이 든 것인지, 나이 먹어 기운이 빠진 것인지...

이유가 뭐가 됐든 저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도움이었습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남편 덕을 보게 되었네요.

 

그렇게 수차에 걸친 항암치료를 마치고, 저는 수술까지 받았습니다.

재발확율이 높다지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에 대한 제 의지를 꺾는 일이 또 한번 생겼습니다.

지금껏 제 곁에서 묵묵히 지켜준 남편의

본색이 또 드러났네요.

 

제가 아파서 경계를 소홀히 한 틈에

저 모르게 돈을 갖다 썼더군요.

그것도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게 큰 돈을 펑펑.

 

그 돈 쓰는 재미에 붙어 있었나 싶으니, 비참하고 분합니다.

제가 곧 죽을 줄 알고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던 걸까요?

이렇게 빠닥빠닥 살아나니, 실망일까요?

 

그런데 그보다 더 비참한 건, 남편한테 대놓고 화도 못 내는 제 자신입니다.

제가 지금 너무 약해져 있어서 악 쓰며 싸울 자신도 없고

막상 남편 없이 살 자신도 없어요.

사랑해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아파서요.

혼자 먹고 살기 힘들어서요.

 

건강이 최고의 재산이라는 게 확실하네요.

돈도, 자식도, 인연도, 감정도,

내 몸 아프니 내 뜻대로 되지 않아요.

웬수 같은 인간에게라도 도움을 받아야 하고,

속셈이 빤한 인간이라도 곁에 있어줘야 안심이 되니...

슬프고 비참합니다.

 


댓글 15

댓글 쓰기
0/2000 byte
이전글
딸의 행복에 걸림돌이 되고 싶진 않은데... (14)
다음글
시부모는 시부모일 뿐, 애쓸수록 고달파져... (12)